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존 애덤스 (문단 편집) == 행적 == [[변호사]] 시절에는 [[보스턴 학살 사건]]에서 시민들에게 총을 쏜 영국 병사들을 변호한 적이 있었다. 당시 영국 병사들을 미국 내에서 변호해주려는 인물도 찾기 어려웠던 상황이었고, 실제로 이 때 영국 병사가 유죄로 처벌을 받았으면 영국 정부가 강경책으로 전환해 훨씬 일찍 무력개입이 시작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영국 병사를 정당방위로 무죄로 몰아가는 과정에서 주동자들을 숨기는 형태로 당시 과격파들을 보호하는 역할도 했다.[* 그래서인지 [[대체역사]]를 다룬 책 [[만약에]]에서 역사학자 토머스 플레밍은 만약 존 애덤스가 변론을 하지 않았다면 보스턴에는 강경대응에 나선 영국 정부가 파견한 군대가 깔렸을 것이고 당연히 [[보스턴 티 파티]]는 벌어질 엄두도 못내었을 것이라고 추론하기도 했다.] 훗날 존 애덤스는 이에 대해 "일찍이 조국에 바친 최고의 봉사 중 하나"로 이 행동을 꼽기도 했다. ||[[파일:JohnAdams1785.png|width=500]]|| || 1785년 영국대사 시절의 애덤스 || 존 애덤스는 [[알렉산더 해밀턴]]과 함께 미국 초기 연방주의자(federalist)들의 거두였으며, 독립 선언서를 작성할때 참여했던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의 정책은 연방정부의 권한 강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대통령 선거는 [[2등]]을 한 후보에게 [[미국 부통령|부통령]] 직위를 주었고, 존 애덤스 다음으로 표를 많이 받은 사람이 그 유명한 공화주의자이자 훗날 애덤스 다음 3대 대통령이 되는 정적 [[토머스 제퍼슨]]이었기에, 애덤스의 집권 4년 동안 그는 제퍼슨파의 견제에 자기 마음껏 정부를 운용할 순 없었다. 재선도 왜곡 보도 등 토마스 제퍼슨 측의 정치적 공세에 결국 실패했다. 이런 정치적 앙숙 관계는 말년에 화해하기 전까지 이어진다. 한편, 당시 미국은 독립국이긴 했어도 아직은 땅도 지금 미국에 비하면 많이 좁고 인구도 건국 초 기준 250만 수준의 신생 국가라 유럽 국가들에게 비빌 짬밥은 아니었는데, 때마침 [[프랑스 혁명 전쟁]]에 참전한 영국은 전쟁에 투입할 전력을 최대한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같은 언어를 쓰는 미국 상선을 습격하여 배와 선원들을 자국 해군으로 강제로 편입시키는(...) 막장 행위도 종종 저지르자, 유럽 일에 끼어드는 것에 거부감을 가진 미국은 프랑스에 특사를 보내 영국의 행위를 저지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당시 프랑스 정계 실력자였던 [[탈레랑]]은 미국 특사들을 푸대접한 것은 물론 미국에게 거액의 돈을 요구했다. 미국의 연방주의자들은 이러한 처사에 분노했고 --영국 대신-- 프랑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프랑스를 상대할 국력도 안 됐을 뿐더러 미국 정부는 이 시기에 프랑스와 친하게 지내는 반역자들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외국인법을 제정했지만, 실제로는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법이었다. 이는 독립전쟁 당시 지원을 해준 프랑스를 영국보다 좋아한 데다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미국 정부의 권력 확대를 경계하던 공화주의자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행위로 비쳐진 건 당연지사. 결국 애덤스는 전쟁을 철회했고 연방주의자들도 애덤스에게 실망해 지지를 철회해 버려 재선에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애덤스는 자신의 정부에서 딴지 걸기 바쁘던 정적 [[토머스 제퍼슨]]이 편하게 대통령 임기를 보내게 할 생각도 없었다. --너도 맛 좀 봐라-- 애덤스는 임기 종료 '''바로 전날''' [[연방대법원]] 판사들을 전부 연방주의자로 앉혀버렸고 매버리 대 메디슨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한편 대법원장은 애덤스와 친했던 [[존 마셜]]이 차지했기 때문에 제퍼슨은 임기 내내 사법부의 견제를 받았다. 워싱턴 때부터 중립성을 엄중하게 지키던 미국 법원의 전통은 이때부터 확고해졌다. || [[파일:external/totallyhistory.com/Gilbert-Stuart-John-Adams-in-1826.jpg|width=200]] || || 1826년 사망 몇달 전 || 평생 토머스 제퍼슨과 정적으로 얽히고 설킨 관계였으며 한창 싸울 때는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서 서로 말도 안 하고 살았지만[* 애덤스는 변호사 시절의 언변으로 수려하게(?) 제퍼슨을 폄하하고, 당연하게 제퍼슨은 그런 아담스를 싫어했다.] 말년에는 [[화해]]도 하고 [[서신]]도 자주 교환했다. 공교롭게도 둘은 같은 날, 그것도 미국 독립 50주년을 맞은 [[1826년]] [[7월 4일]]에 사망한다.그때가 향년 91세[* 당시 미국 대통령은 그의 아들 [[존 퀸시 애덤스]]였다. 즉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은 임기 중 독립기념일에 부친상을 당한 것이며 존 애덤스는 아들이 대를 이어 부자(父子) 대통령이 되는 것까지 지켜보고 간 셈이 되었다.] 유언은 '''"토머스 제퍼슨은 아직 살아있...(Thomas — Jefferson — still surv — )"'''가 유명한데, 보다시피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죽었으며, 토마스 제퍼슨은 이 말을 하기 몇 시간 전에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